[인터뷰] 충남 무형문화재 이지수 옹기장, “‘도고 옹기’ 후계자 찾는 게 마지막 소원”
[인터뷰] 충남 무형문화재 이지수 옹기장, “‘도고 옹기’ 후계자 찾는 게 마지막 소원”
  • 이동현 기자
  • 승인 2022.11.21 0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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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지원금 월 120만원 불과…3대째 가업 명맥 끊어질 위기

옹기를 제작 중인 이지수 옹기장
옹기를 제작 중인 이지수 옹기장

항아리 용기가 대세던 1960년대, 아산은 옹기의 고장이었다.

온양시내 모종동은 흙이 좋기로 유명한데다 염치·도고·선장 등 아산 곳곳 옹기가마들은 모두 성업을 이뤘다.

그중에서도 도고면 금산리는 한때 300명도 넘는 옹기공이 모여 살던 장항선 최고 옹기마을로 불렸다.

삽교천이 방조제로 막히기 전 인주와 선장까지 배가 들어왔는데, 배에 실려 온 새우젓과 소금이 금산마을 옹기에 담겨 전국으로 팔려나가면서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도고에만 옹기가마가 5기에 달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 용기가 등장하고, 김치냉장고까지 대중화되면서 옹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옹기는 좋은 흙을 고르는 것부터 잿물을 만들고 1천200℃ 불가마에 구워내기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는 중노동이지만, 더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됐다.

이에 그 많던 옹기장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나거나,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이지수 옹기장(충남도 무형문화재 38-2호)은 여전히 옹기가마를 지키고 있다.

옹기장이던 할아버지(故 이관여)와 아버지(故 이원범)에게 16살 때부터 흙 만지는 법을 배웠다는 이지수 옹기장은 벌써 60년이 넘었다.

그는 "힘에 부칠 때도 많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숨 쉬는 그릇'을 만든다는 자부심과 '천년의 지혜가 담긴' 전통 옹기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손에서 흙을 놓지 못한다"고 술회했다.

이지수 옹기장은 "선장·도고지역은 우물을 파도 짠물이 나왔다. 그 물을 퍼다 옹기에 담아두면 일주일이면 저절로 정화되고 짠기가 사라졌다"며 "수도도 정수시설도 없던 시절에 옹기 덕에 그렇게 먹고 살았다. 고추장·된장·김치 같은 우리의 좋은 발효 음식도 옹기가 없었다면 발달할 수 있었겠나? 이렇게 좋은 그릇인데, 이젠 만드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플라스틱이 가볍고 편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옹기의 맥이 끊기게 둘 수야 없다"는 확고한 마음속 생각을 밝혔다.

충남도는 이지수 장인 가문의 역사와 노력 및 공헌 등을 인정해 그의 집안을 지난 2000년 충남도 전통문화가정(8호)으로, 이지수 장인을 지난 2008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하지만 3대째 이어지던 가업의 명맥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수자 교육까지 마친 아들이 가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실정은 옹기 수요 자체도 줄어 수입이 많지 않은데다 무형문화재에 지정돼 자타공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인' 반열에 올라도 전승지원금은 불과 월 120만원 수준으로, 월 200만원 벌기도 녹록지 않은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결혼해 가정까지 꾸린 아들에게 이 힘든 길을 따라오라 말하기도 어려운 현실인 것이다.

이지수 장인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도고 옹기발효음식 전시·체험관에서 기초교육 과정 및 전문가 양성과정을 운영하며, 도고 옹기의 명맥을 이어줄 후계자를 찾고 있다"며 "옹기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은 제법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 길을 걷겠다고 나선 이는 아직 없어 고민"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르치다 보면 손재주 있는 사람, 가르치면 뭔가 될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그만둬버려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알려주고 싶은 비법은 많은데 알려줄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운 심정의 속내를 토로했다. 

한편 옹기의 효과를 알아보고 찾아주는 이들 덕분에 기운을 얻는다는 이지수 장인은 "주말이면 도고 옹기발효음식 전시·체험관에 전국 다양한 옹기를 관람하고, 옹기 만들기 체험을 하기 위한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며 "전통 옹기 구입도 가능한데, 기념품 삼아 사간 이들이 '써보니 너무 좋아 더 사러 왔다'는 인사를 들으면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고, 없던 힘이 다시 생긴다"고 60여년 옹기인 삶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나이가 이제 여든 둘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그저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지금 하는 일 해줄 사람, 진득하게 오래갈 사람 하나 잘 가르쳐두고 가는 거, 그거 말곤 바라는 게 없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라고 후계자 찾기를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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